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독소전쟁]] 시절 ===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났고 [[드니프로|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는 [[독일 국방군]]에 점령당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도시의 산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정치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해 10월 브레즈네프는 [[여단]] 인민 위원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남부 방면 군 정치 지도부 차장이 되었다. 1942년 우크라이나가 [[제3제국|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브레즈네프는 [[캅카스]] 방면의 정치 지도부 차장으로서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943년 4월 그는 제18군의 정치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말에 소련군은 주도권을 잡고 반격에 나섰다. 소련 육군 제18군은 제1 우크라이나 방면군의 일부가 되어 [[우크라이나]]를 다시 되찾고 서방으로 진격했다. 당시 방면군의 상급 정치 위원은 후에 브레즈네프의 중요 후원자가 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브레즈네프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제4 우크라이나 방면군 정치 지도부 부장으로서 [[프라하]]로 갔다. 브레즈네프가 자체 훈장 수여와 주코프 회고록 조작 등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깎아 먹긴 했지만, 어쨌거나 브레즈네프가 캅카스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진군하며 전선에서 활약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독소 전쟁의 참담한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브레즈네프는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전쟁을 기피하는 성격이 되었다. 훗날, 서기장이 된 뒤에도 브레즈네프는 프라하 침공, 아프간 침공 등 중요한 군사적 결정에 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무력 개입이라는 선택지를 꺼리며 [[데탕트]] 노선을 유지하려 했다. 1946년 8월, 브레즈네프는 육군 [[준장|소장]] 계급을 단 것을 마지막으로 [[소련군]]에서 [[전역]]했다. 이후에는 전후 재건에 참여했고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지구당]]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50년에는 [[소련 최고회의]] 의원이 되었으며, 그 해 말에 [[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취임했다. 몰도바에서 일하면서 주민들의 처참한 삶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말년에 회고록을 집필할 때도 몰도바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구구절절 언급했다. 브레즈네프는 몰도바인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공식 기록과 통계상으로는 브레즈네프가 제1서기로 있으면서 몰도바의 상황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나와 있다. 흥미롭게도 브레즈네프 자신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성공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통계와 정부 보고서와는 별개로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일부 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1952년, 소련 공산당 19차 당 대회에서 보고를 맡은 그는 이 때 처음으로 스탈린과 대면하게 되는데, 스탈린은 그를 두고 '아주 잘생긴 몰도바인'이라고 총애했다고 한다. 대회 이후, 브레즈네프는 당 중앙위 위원으로 승진했고, 재차 소련 공산당 상무 회의 후보 위원, 당 서기국 서기로 파격 승진하였다. 브레즈네프는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몰도바]],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에서 만든 인맥을 권력 강화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그들 중에서는 [[콘스탄틴 체르넨코]], 딘무하메드 코나예프, 니콜라이 티호노프도 포함되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